조각배


 그녀의 머릿결이 향기로웠다. 저만치 다가오는 봄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듯,
 여인의 단아한 향기는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아른아른 서로를 향해 미
소 짓는 사계절의 환한 미소였다. 다가서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가까워지는 선한
 눈동자, 햇살을 품고 있는 아침이슬처럼 영롱했다. 찬란한 여명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눈을 떴다.
 봄은 일찍이 와 있었다. 나뭇잎들의 흔들거림에 눈이 부시다.
 신록에 내리쬐는 햇볕이 청초한 대지위에 비주면 맞닿는 곳마다 광채가 눈부신 것
처럼, 아지랑이는 차마 눈 뜨고도 볼 수 없었다. 
 세월의 손목에 이끌려 온 그녀는 어느덧 내 가슴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무척이나 단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지워지지 않는
 산수화를 그리는 동안, 그곳엔 그녀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그녀는 비단금붕어를
 기르고 있었으며 나는 한 여인을 담을 수 있는 연못이 되어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내 가슴이 젖어 있지 않으면 늘 마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 볼 일, 사랑은 젖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작은 수맥에도 전율을 일으키며 교감하는 것이다. 고압에
 감전된 듯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서로를 향해 불꽃을 틔우는 것이며 때론, 터진 수
맥에 폭포수처럼 흐르는 젖은 가슴으로 불꽃을 끄는 일이다. 
 잠재우고 일으키고 모르는 척 눈 감고,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터로 이끌려 따라
 나서는 일이다. 그리하여,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지켜 주는 파수꾼이 되어 쉬지 않
고 물을 길어 붓는 일이다.
 제 아무리 척박한 땅에도 봄은 찾아온다. 그곳엔 분명히 옥토같이 푸른 잡초가 무
성히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듬성듬성 오랫동안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거목이
 있는가를 두리번거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러 할 것이다. 
하찮은 잡초는 무심히 밟고 지나간다. 잡초가 자라지 않는 땅은 이미 죽음에 시달
리는 오염된 땅이다. 귀하게 여겨 쓸모 있게 만드는 일이 땅에 대한 애착이며 사랑
이다.
 무슨 꽃이 피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무슨 꽃의 씨앗을 뿌려 뿌리 내리게 하며 물
을 주는 일이다. 장마철 억수같이 내렸던 빗물을 내 마음의 커다란 물 저장소에 모
아 두었다가 천천히 이곳에 따라 붓는다. 끝없이 번식하며 퇴화되지 않는 사랑, 위
대한 땅에 꽃씨를 뿌려 그녀의 그 무슨 꽃이 되어 피어 있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꽃
으로 피어 있으면 그만이다. 빛의 그림자는 저 홀로 만들지 못해 그녀가 있기에 내
가 그녀의 그림자가 되고 그녀는 나를 닮은 내 그림자가 되어 가며 살아도, 그림자
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서로를 비출 수 있는 빛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
 그늘진 음지까지 서로를 비추며 살아 갈 수 있다는 것, 해가 뜨는 낮부터 달이 뜨
는 밤까지 끝없이 찬미하고 경이로운 심장에 송수관을 연결하며 삶을 공급하고 기
쁨과 슬픔까지 온통 나누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내 가슴에 비타민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눈동자 밖으로 비추는 세상은 순수하기 때문에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단조로운 일
로 길들여져 있다. 힘이 발산되는 곳엔 늘 서로 다른 기류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장
벽을 넘어 서는 일은 거친 물살을 뚫고 헤쳐 나가는 망망대해 거대한 뱃머리와 같
다. 
 풍랑 속엔 닻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이 오고 파도가 잠잠해지면 또 다시
 배는 닻을 올린다. 배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히 올라 넘어 서듯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며 둘이 아닌 하나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다. 
 내 가슴에도 풍랑이 일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인간의 가슴을 안고 살아가서
 그 얼마나 많은 파도와 부딪치며 싸우며 내렸던 닻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하면
서, 내 자신과의 갈등으로 침몰시킨 조각배가 또 얼마였던가.
 지금, 서로 다른 역경을 넘어 설 때가 바로 지금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있을 때가 지금이다. 파도를 넘어 그녀를 싣고 물살을 헤쳐 나
갈 때가 바로 지금이다. 비라도 내리면 좋은 날, 언제 잃어버렸을지 모를 나의 작은
 조각배를 찾으러 가기 참 좋은 날이 오늘 같은 날이다.


                             글/ 錦袍 권영의 『에세이단상』송녹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