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廢寺址)에서
                                 
                                              엄원용       
                                         
폐사지에 가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외로운 주춧돌 하나에 눈을 던지고
천년 거슬러 오라가면
붉은 두리기둥, 낡은 단청 위로
날렵한 처마 끝이 하늘을 가린다

폐사지에 가면 보이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쩌다 모질게 살아 남아
이리저리 차이는 돌덩이 하나 
흙 속에 딩구는 석등(石燈) 한 조각
면마다 귀마다 아로새긴 때 묻은 님의 손길이
아직도 천년 세월이 새롭다. 
 
폐사지에 가면 또 누구도 만날 수 있다.
새벽 범종 소리 영혼을 흔들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부산하게 어둠을 가르던 사람들,
애증의 굴레에서 몸부림치던 그리운 님들,
없어도 가장 넉넉하고
높아도 가장 겸손함에 고개를 숙인 사람들,
비어 있는 마음들을 들여다보면
나도 어느새 석상이고 싶어진다.

폐사지에 가면 바람도 맞을 수 있다.
덧없이 흐르는 물결 위에
역사란 얼마나 무상하냐
한 때의 영화도 자랑도
천년 느티나무 가지에 스치는 바람
아득한 자취 몇 개 남아있는 허허한
그 빈터에서 지금 나는
비운의 철학도 배우고 있다.

                    2004. 12